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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의 두 가지 자질

만신의 두 가지 자질

  • 기자명 서재영 교수
  • 입력 2024.07.11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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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을 맞아 박칼린이 연출을 맡은 창극 ‘만신: 페이퍼 샤먼’을 보았다. 굿거리장단으로 샤머니즘을 다룬 창극으로 줄거리는 이랬다. 삼신 할멈에게 빌어서 얻은 여자아이 실은 남다른 자질을 갖고 태어났다. 소녀는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 범상치 않은 예민함 때문에 소녀는 마을에 머물지 못하고 신어머니를 찾아가 만신(萬神)이 된다.

만신(무녀)이 된 실은 5대륙의 샤먼을 만나 그들의 대지에 묻혀 있는 원혼들을 달래는 치유 여행을 다닌다. 아프리카의 샤먼은 노예무역으로 희생된 원혼에게 빙의되어 처참했던 고통을 증언하고, 북미의 샤먼은 골드러시로 땅을 빼앗기고 사지로 내몰린 원주민들의 참상을 폭로한다. 나아가 한국전쟁과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지구의 만행, 인간에 의해 파괴된 자연과 생명의 멸종을 고발하며 그들의 고통을 치유하는 굿판을 벌인다.

창극은 만신이 가진 두 가지 자질을 부각한다. 첫째는 타인의 고통을 알아차리는 예민함이다. 흔히 만신의 역할은 운명을 점쳐주고, 재복을 빌어주며, 재앙을 소멸케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만신의 진짜 능력은 원통한 원혼의 절규를 듣고, 그 고통에 공감하는 예민함이다. 만신은 그런 자질로 은폐된 원혼들을 깨우고, 세상이 덮어 둔 사연을 파헤친다.

돌아보면 우리의 근대사는 고통으로 퇴적된 지층 위에 서 있다. 일제의 식민 통치와 동족상잔의 전쟁, 이념의 광기와 독재의 야만, 고도성장에 짓눌린 소외가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원혼들의 절규를 듣지 못하고, 그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먹고살기 바쁘기 때문이고, 생존의 고통에 시달려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이다.

만신의 두 번째 자질은 빙의(憑依)이다. 빙의란 원혼이 만신의 몸을 빌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만신이 원통한 사연을 가진 원혼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것을 말한다. 원혼은 만신의 입을 빌려 자신이 당한 원통함을 호소하고, 숨겨진 범죄를 폭로한다. 만신에게 빙의되어 원혼이 되살아나는 공간은 바로 굿판이다. 밤새 펼쳐지는 굿판은 억울한 자들의 법정이자 은폐된 비밀이 공유되는 공론의 장이기도 했다.

점잖은 성직자들은 원혼들의 사연을 완곡하게 표현하고, 극도로 감정을 배제하고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고상을 떤다. 하지만 만신은 원혼들이 당한 참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슬픔과 분노 같은 격정적 감정까지 담아낸다. 사연도 사연이지만 그들이 받은 느낌, 정신적 상처가 본질이기 때문이다. 신분제 사회나 정치적 폭압 아래에서 누구도 사회적 범죄를 말하지 못할 때 만신은 빙의를 통해 은폐된 범죄를 폭로했다. 빙의된 만신의 입을 통해 죄상이 고발될 때 억울한 사연을 공유한 산 사람들도 함께 위안을 받게 된다.

우리는 주술의 정원에서 깨어난 21세기에 살고 있기에 아직도 그런 역할을 만신에게 기대할 수는 없다. 여전히 만신은 존재하고 곳곳에서 굿판도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 사건이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것들이다. 만신이 했던 치유의 역할은 정신과 의사나 심리치료사 같은 전문가 그룹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도 개인적 고통을 달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에 사회적 문제를 공론의 장으로 드러내는 사례는 드물다.

그렇다면 소리 없는 약자의 목소리를 듣고, 억울한 사연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고, 고통을 치유하는 것은 누구의 몫일까? 현대사회에서 그 역할은 언론과 정치의 몫이다. 언론은 만신처럼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하고, 원혼에 빙의된 만신처럼 억울한 사람에게 입을 빌려주어야 하고, 숨겨진 범죄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야 한다.

아쉽게도 우리가 처한 언론환경은 절망적이다. 권력은 언론을 시녀로 부리기 위해 방통위와 방심위 등을 장악하고 온갖 기형적인 일을 벌이고 있다. 방통위는 합의제 기구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임명한 2명의 위원이 중대사를 결정하고,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사에는 재갈을 물리고 있다. 그렇게 장악된 방송들은 권력을 향한 비나리를 읊조리며 작두를 타고 있다.

레거시 미디어로 불리는 주류 언론은 약자의 사연에 둔감하다. 반면 검찰과 권력의 동향과 자본의 이해에는 극도로 예민한 촉수를 가지고 있다. 간혹 사회적 재난과 민초들의 고통에 대해 다루기도 하지만 ‘피로감’이라는 이유로 재빨리 묻어버리기 일쑤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나 용산 참사같이 사회적 재앙과 민초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일에 피로감이란 있을 수 없다.

‘보현행원품’에는 보살이 보살행을 실천함에 있어 “지치거나 싫증 내지 않겠다.”는 다짐이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언론은 억울한 사연을 폭로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일에 지치거나 싫증을 내서는 안 된다. 그런 역할에 싫증을 느끼는 순간 언론에게 주어진 사명을 저버리는 것이다. 민주사회에서 민초들은 주권자인 동시에 권력의 대척점에 서 있는 약자이다. 따라서 언론은 만신처럼 민초들의 고통에 예민해야 하고, 그들에게 빙의되어 그들의 언어를 말해야 한다.

공론의 장으로 드러난 이슈를 바로잡는 것은 정치의 몫이다. 민초들의 고통과 억울함을 해소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위정자의 책무다. 아쉽게도 이 나라의 대통령은 주권자의 고통에 둔감하고 무지하다. 김진표 전 국회의장에 따르면 대통령은 이태원 참사에 대해 “특정 세력에 의해 유도되고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고 한다. 민초들의 고통을 보살피는 대신 극우 유튜버에 빙의되어 책임 전가에만 급급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여당의 한 의원은 채상병의 죽음을 ‘군장비 파손’에 비유해 물의를 빚고 있다. 부당한 지시로 사망한 금쪽같은 청춘의 희생을 장비 파손에 비유한 것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도구적 가치로 폄훼하는 천박함을 보여주었다. 이병과 일병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군미필자의 말이라 더욱 울화가 치민다. 그런데도 여당에서는 스타 탄생이라고 환호했다니 참담하기 그지없다.

부디 감수성 예민한 만신처럼 민초들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아는 언론, 주권자인 국민에게 빙의되어 정의를 실현하는 정치가 하루빨리 실현되기를 비나리처럼 되뇌어 본다.

서재영(성균관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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