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부처님은 법문을 기다리는 대중들을 향해 한 송이 연꽃을 들어 보였다. 모두가 그 의중을 몰랐지만 가섭만이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꽃을 드니 미소 지었다’는 염화미소(拈華微笑)의 이야기다. 바야흐로 따가운 햇살 아래 연꽃이 곱게 피는 계절이 왔다. 굳이 누군가 연꽃을 들어 보이지 않더라도 지금은 곳곳에 연꽃이 가득하다. 하지만 연꽃을 보아도 우리는 가섭이 미소 지은 의미를 알 수 없다. 어쩌면 연꽃이 어떤 꽃인지 알게 된다면 그 미소에 담긴 뜻을 헤아리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연꽃의 세 가지 이름모든 꽃이 그렇겠
방학을 맞아 박칼린이 연출을 맡은 창극 ‘만신: 페이퍼 샤먼’을 보았다. 굿거리장단으로 샤머니즘을 다룬 창극으로 줄거리는 이랬다. 삼신 할멈에게 빌어서 얻은 여자아이 실은 남다른 자질을 갖고 태어났다. 소녀는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 범상치 않은 예민함 때문에 소녀는 마을에 머물지 못하고 신어머니를 찾아가 만신(萬神)이 된다.만신(무녀)이 된 실은 5대륙의 샤먼을 만나 그들의 대지에 묻혀 있는 원혼들을 달래는 치유 여행을 다닌다. 아프리카의 샤먼은 노예무역으로 희생된 원혼에게 빙의되어 처
전통적으로 지식을 생산하고 학습하는 것은 대학의 몫이었다. 하지만 생성형 AI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급변하고 있다. 각 대학에서도 교수자들을 대상으로 AI 교육을 개설하며 대책을 모색하고 있고, 대학원생들은 AI를 활용한 논문 작성법에 골몰하고 있다. AI를 잘 활용하면 연구의 효율을 높이고, 더 많은 성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학생들의 창의적 학습과 객관적 평가를 위해서도 AI를 알아야 한다. AI를 활용하면 웬만한 과제는 프롬프트 몇 개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 읽고, 힘들게 리
싱그러운 봄바람에 신록이 배처럼 일렁이는 날 호암갤러리를 찾았다.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이라는 주제의 전시를 보기 위함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모셔 온 국보급 작품들을 여성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기획전이었다. 오늘은 그곳에서 만난 한 폭의 탱화를 통해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한 편의 꿈에서 시작된 삶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아기 부처님을 목욕시키는 관불의식을 하고, 봉축 행사도 부처님의 탄생에 맞춰 진행된다. 하지만 위인들의 삶은 태몽이라는 형식을 통해 영웅의 탄생을 예고하는데 부처님의 탄생 역시 한 편의 꿈으로부
영화 파묘가 올해 첫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화제를 모았다. 특히 총선 기간 동안 이승만을 다룬 영화 건국전쟁과 대립각을 이루면서 영화 외적으로도 주목받았다. 영화는 점차 대중의 관심에서 잊혀져 가고 있지만 여전히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되새김질하게 한다.파묘는 무속과 풍수지리 등을 소재로 곳곳에 항일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내용을 분석하지 않아도 등장인물의 이름이나 소품에서부터 이런 메시지는 드러난다. 지관 상덕, 무당 화림과 봉길, 주지 원봉 등은 모두 독립운동가들의 이름과 겹친다. 차량번호 또한 광복절과 3・1운동, 해방을 연상시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교보문고 앞을 지날 때마다 의미를 곱씹게 하는 구절이다. 흔히 온라인의 특징을 쌍방향이라고 하는데 가장 오래된 미디어인 책과 사람의 관계도 쌍방향임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사람이 책을 만들었지만, 그 책이 다시 사람을 만든 사례는 무수히 많다. 심지어 불립문자를 지향하며 깨달음의 체험을 추구하는 선승을 통해서도 그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책은 사람을 만들고성철스님은 청년 시절 삶의 문제를 안고 고뇌하던 차에 『증도가』라는 책을 읽고 한 줄기 빛을 만난다. 한 권의 책이 준 강렬한 체험은 뼈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한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도 시간이 지나면 뇌리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디지털 사회로 전환되면서 그도 옛말이 되었다. 한번 생성된 정보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따라다닌다. 사회적 영향력이 큰 공인의 허물에 관한 일이라면 더욱 그렇기에 부패를 방지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물론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절대권력이라면 권력의 허물은 은폐되고 실시간으로 지워지기도 한다.가래침 지우기 경쟁옛날에 아무 곳이나 가래침을 뱉는 임금이 있었다. 신하들과 산책하다가도 가래침을 탁 뱉었다. 예의 없고 불쾌한
북한산 자락에 살면서 누리는 특전 중 하나는 설경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눈발이 백운대와 인수봉을 하얗게 덮는 날이면 강아지 마냥 어떤 설레임에 이끌려 숲으로 달려가게 된다. 어쩌면 비단 같이 고운 눈길 위로 가장 먼저 나만의 발자국을 남길 수 있는 매력 때문인지도 모른다.소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찌 보면 족적(足跡) 없는 삶이다. 어디를 가든 아스팔트 위를 걸어가듯 흔적이 남지 않는다. 어떤 영역이든 수많은 대중들의 어지러운 발자국에 의해 이미 단단하게 다져져 있다. 하물며 타인의 발길이 닿지 않은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공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