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일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제 68차 이사회를 개최하여 한국에 선진국(Advanced Country)의 자격을 부여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그동안 경제협력 개발기구(OECD)나 국제통화기금(IMF) 등 유엔 산하의 여러 기구에서 암묵적으로 한국에 대우해 주던, 선진국이라는 지위를 이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로써 한국은 국제 사회에서 —그 참다운 혹은 실질적 내용이야 어떻든— 이제 공인된 선진국이 된 셈이다.‘선진국’이란 무엇인가. 나무위키의 정의를 따르자면 그것은 ‘영어 'D
우리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사촌이 — 그것도 가까운 친척이 논을 사는데 왜 아무 상관없는 내 배가 아프다는 것일까. 상식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말이다. 인륜이란 측면에서 남이 잘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축하를 해 주어야 마땅할 도리이고 또 이해관계라는 측면에서도 그가 부자가 되면 —그의 친척인— 내가 혹시 어떤 곤궁한 처지라도 빠질 경우 그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적이라면 이는 ‘배가 아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워
확실한 통계는 아니지만 이 지구상에는 약 7000여개의 언어가 통용되고 있다고 하니 7000여 민족들이 살고 있지 않을까 싶다. 여러 이견들이 없지는 않으나 일반적으로 민족이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종족을 일컫는 용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가장 교육열이 강한 민족은 어떤 민족일까. 당연히 한민족일지니 이는 OECD가 최근에 발표한 국제학업성취도 평가(PISA 2018)에서 우리 청소년들이 전 세계국가들 중 읽기 2위, 수학 1위, 과학 3위에 오른 것, 전 세계의 그 어느 나라보다도 우리 한국인의 문맹률이 가
언어는 오직 인간만이 갖고 있는 전유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간을,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언어란 무엇인가. 상식적으로 말하자면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는 도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은 언어(langue)라는 정신적 코드가 있는 까닭에 생각이나 정보를 생산해서 말(parole)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이 언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생각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인간 다운 인간, 보다 고상한 인간, 보다 고귀한 인간일수록 높은 수준의 언어를 소유한다. 아니
인문학이란 한마디로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모든 인문학자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화두를 놓고 이를 해명하기 위해 전 생애의 노력을 기울인다.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고 난 후에야 인간다운 삶을 지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물론 고래로부터 보편적인 몇 개의 해답들이 있어왔다. 이성적인 동물,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 지적 호기심을 갖는 동물, 혹은 유희를 즐길 줄 아는 동물 등……필자는 이제 이중에서도 세상에 널리 알려진 명제 하나를 살펴보고자 한다. 고대
사람은 어떤 때 가장 사람다워 보이는가.멋진 옷을 입을 때, 그럴듯한 말을 할 때, 세련되게 행동을 할 때, 매력적인 표정을 지을 때 그러한가. 아니다. 사람은 똑 바로 서 있을 때 사람답다. 굽히지 않고, 기울지 않고, 비틀대지 않고 꼿꼿이 서 있는 그런 사람이 사람다워 보인다.앉아 있기를 좋아 하는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앉아 있기를 좋아한다. 가능한 한 편안한 회전의자에, 흔들거리는 안락의자에, 포근한 소파에 앉아서 담소나누기를 즐긴다. 가능한 한 자신은 편한 자세로 높이 앉아서 서 있는 다른 사람들
인간은 정신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 정신이 없는 육체만의 인간 혹은 육체가 없는 정신만의 인간이란 상상할 수 없다. 정신이 없는 육체를 시신, 육체가 없는 정신을 귀신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뿐 아니다. 건강한 정신 없이 건강한 육체가 있을 수 없고 건강한 육체 없이 건강한 정신이 있을 리 없다. 우리가 일상으로 하는 말이다.그래서 옛부터 우리들은 완전한 인간의 전형을 완전한 정신과 완전한 육체의 결합에서 찾았다. 즉 정신과 육체가 바람직하게 조화를 이루고 문무를 온전하게 겸비한 자를 이상적 인간형으로 본 것이다. 우리들이 문학을
언어가 인간이다. 고래로부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정답은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동물이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직립 보행할 수도, 불을 사용할 수도, 유희를 즐길 수도, 도구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인간에게서 언어만큼 확실하게 인간다움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는 다른 속성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그런 까닭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언어를 구사할 수 있고, 자라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언어 기능의 질적 향상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그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자신들의 모국
그 무렵 어느 외신은,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꽃을 피운다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찾는 일과 같다’고 했다.(영국 의 기사) 독재 권력에 의해 인권이 유린되기 다반사였고 1인당 국민소득 60불이 채 되지 못했던 한국전쟁 직후의 그 황폐했던 50~60년대, 너무 가난해서, 너무 고달파서, 너무 천대를 받아서 그랬을까. 점심을 굶고 주린 배를 움켜쥐며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우리들은 그래서 항상 ‘아는 것은 힘이다’라는 경귀를 입에 달고 살았다.금과옥조였다. 교실의 벽이나, 동사무소의 게시판이나, 골목에 서 있는 전봇대나,
사람들은 잘 사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시집을 보내면서 어머니는 딸에게 잘살라고 축원한다. 오랜 실직 끝에 직장을 갖게 된 아버지는 첫 출근을 하면서 식솔들에게 우리도 잘살아보자고 한다. 몇 번의 낙선 끝에 모처럼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정치인은 이제는 잘살게 되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통속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돈과 권력과 성애(관능의 충족)을 갖는 일이다, 그래서 서구 최초의 문학작품으로 알려진 그리스의 대서사시 ‘일리어드’도 그 발단은 이 돈과 권력에 얽힌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전라도 남원 땅에 가면 ‘광한루(廣寒樓)’라는 누각이 있다. 유서 깊고, 아름답고,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우리 고전, ‘춘향전’의 배경이 된 곳이다. 그런데 광한루 뒤편 좀 외진 대나무 숲속엔 또 우아한 한 칸짜리 한옥 기와집 한 채가 서 있다. 이름하여 ‘춘향각’, 춘향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영정 앞에는 항상 불이 든 향로와 촛불이 준비되어 있으므로 찾는 이는 누구나 춘향에게 참배를 드린다. 그 춘향의 초상이 아름답다. 참으로 우리 민족을 대표할 만한 미인도의 하나다.그런데 춘향의 이 영정은 춘향의 진짜 모습일까? 그럴 수
학문이란 모르는 그 무엇에 대해 알고자 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어원적으로 영어의 ‘science’, 독일어의 ‘Wissenschaft’가 다 그러하다. 한국어 ‘학문’도 배울 ‘학學’ 물을 ‘문問’자의 합성어 아닌가.그렇다면 인간이 알고자 하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우리의 인식기관이 접하는 이 세상 모든 사물들일 터이니 이를 세세히 열거하려는 시도 자체가 부질없는 일, 다만 우리는 그 범주를 세 가지 영역 정도로 나누어 살펴볼 수는 있으리라 생각한다. 첫째, 나 자신을 포함한 인간이다. 먼저 자신을, 인간을 알아야 존재
우리들에게는 알게 모르게 보수는 과거 퇴행적, 진보는 미래 발전적이라는 편견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보수적이라고 하면 무사 안일을 추구하는 어떤 속된 인간으로 취급하는 듯싶어 기분이 좀 나빠지고, 반대로 진보적이라 하면 무언가 깨우치고 선도적인 사람으로 알아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사실이다.요즘 우리의 일부 젊은이들이 보수의 전형으로 소위 ‘꼰대’ 라는 인간형을 드는 것 역시 같은 속내를 드러낸 말일 것이다.피상적인 우리네의 언어적 감수성으로는 아마 그럴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령 어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