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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지하화로 사라져갈 창밖의 풍경

철도 지하화로 사라져갈 창밖의 풍경

  • 기자명 손혁기 SR 홍보부장
  • 입력 2024.04.17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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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시청률 20%를 넘기고, 지난달에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방송영상 프로그램’ 1위를 차지한 tvN 드라마 눈물의 여왕’. 용두리 이장 아들 '백현우'(김수현 분)는 퀸즈 그룹 재벌 3세이자 백화점의 여왕인 '홍해인'(김지원 분)과 기적처럼 결혼한다. 하지만 살벌한 재벌가 처가살이와 아내 등쌀에 3년 만에 이혼을 결심한다. 그런데 홍해인이 뇌종양을 앓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결혼보다 더욱 기적처럼 부부간의 로맨스가 다시 살아난다. 평범한 일상에서 벌어지기 어려운 우연한 설정도 많지만, 국내외 시청자들이 눈물과 웃음을 함께한다. 달달한 로맨스를 뒷받침하는 김수현과 김지원 배우의 탄탄한 연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두 배우의 빛나는 외모도 큰 몫을 한다.

3년 차 부부가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며 키스를 하는 비현실적인 곳은 독일 포츠담에 있는 상수시 궁전이다. 바로크 양식의 대표 건축물이 태양왕 루이 14세의 강력한 왕권을 나타내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이라면, 로코코 양식의 대표 건축물이라 할 수 있는 상수시 궁전은 왕실의 권위보다는 귀족의 부드럽고 섬세함이 녹아 있다. 제작진이 재벌가를 현대 귀족으로 설정하고 이들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소로 꼽았다고까지는 생각되지 않는다. 상수시(Sanssouci)는 프랑스어 '~가 없는'이라는 뜻의 ‘sans’'걱정'을 뜻하는 ‘souci’가 합쳐진 말로 걱정 없는 궁전이라는 뜻이다. 걱정 없어 보이는 재벌가도 이런 걱정은 하고 산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그런데 필자의 직업상 엉뚱한 곳에서 걱정이 생겼다. 드라마에서 백현우는 보스턴백 하나 달랑 들고 인천국제공항을 달려간다. 곧이어 상수시 궁전에 나타난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상수시 궁전이 있는 포츠담은 물론 독일 수도 베를린조차 인천공항에서는 한 번에 가는 직항편이 없다. 드라마에서 생략된 여정을 집어보자면 가장 빠른 항공편은 인천공항에서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공항으로 가서 베를린 브란덴부르크행 국내선으로 갈아타는 경로다. 그리고 베를린에서 다시 차로 1시간 가까이 이동해야 한다. 수속이나 환승 시간을 생각하면 적어도 17시간 이상 걸린다. 재벌가 사위라 일등석을 탔겠지만, 대부분 여행자는 일반석에서 이코노미 증후군에 시달리기 딱 좋은 일정이다.

TV나 유튜브의 편집된 여행 영상들은 관광지와 맛있는 음식들로 가득하지만, 막상 여행 계획을 세워보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이동수단이다. 국외 여행은 물론이고 국내 여행에서도 2시간 이상 이동해야 한다면 중요한 변수가 교통편이다.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으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도 인기 있는 영국의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을 생각의 산파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알랭 드 보통이 말한 여행 중 상당 부분은 이동이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에서 내적인 대화가 이뤄진다고 말했다.

비행기가 극지를 넘으며 설경을 담아주고, 거대한 도시 위를 지나며 야경을 보여주면 우리는 일상을 떠나 새로운 생각을 열어간다. 백현우가 서쪽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면 검푸른 서해 바다, 척박한 고비사막 위에서 사랑하는 아내가 시한부 판정을 받은 아픔과 힘들었던 결혼의 시간을 되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카자흐스탄을 거쳐 헝가리 상공을 지날 때는 카스피해와 흑해 연안의 도시들이 밝힌 불빛에서 희망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땅과 떨어져 보이는 낯선 풍경과 구도가 현실의 어려움에서 잠시라도 멀어지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에 가장 큰 도움을 주는 여행 수단은 기차다. ‘비행기 여행보다 기차 여행이라는 단어가 익숙하고 흔한 것은 기차는 타는 그 순간부터 여행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여행의 기술에서 열차 밖 풍경은 안달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러면서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움직인다고, 특히 부엌 찬장에서 컵을 꺼내는 순간, 공원에서 공놀이하는 어린이 등 사적 영역을 흘깃 보여주면서 영감을 준다고 했다. 고속열차가 늘어나면서 창밖의 풍경에서 사적인 영역은 사라지는 추세다. 속도가 내는 소음에 철도와 주거지역의 거리는 멀어졌고 사람의 잔상을 찾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열차는 여전히 계절이 바뀌는 산과 들의 풍경을, 논과 밭을 일구는 농촌의 모습을 시간에 따라 다른 빛깔로 보여주며 경험에 갇혀있던 생각을 새로운 영역으로 안내한다.

하지만 여행을 가능하게 하고, 아니 여행 그 자체인 열차는 목적지에 밀려 수단으로만 취급받기 쉽다. 지난 총선 직전 처음 개통한 GTX와 여야 모두 주요 공약으로 삼은 철도 지하화. 한때 많은 화가와 작가, 사상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던 열차는 이제 지하로 숨겨야만 하는 천덕꾸러기가 됐다. 정차역은 집값이 올라 좋지만, 철도는 집값을 떨어뜨려 싫다. 불가근불가원의 대상이다. 지하화 공약에 언제까지가 없었기 때문에, 또 시기를 명시했다고 하더라도 예산 운영이나 다른 명분들에 밀릴 수는 있지만, 국내외 사례를 보더라도 메가시티에서 철도 지하화는 큰 방향에서 정해진 수순이다.

지하화된 열차는 더는 여행을 품지 않는다. 빠른 속도를 위해 풍경은 터널에 묻힌다. 그렇다고 정서적 권리까지 내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하화와 함께 이용자의 정서도 배려해야 한다. 정서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건축비의 일정 비율은 문화예술작품 설치에 쓰도록 의무화하고 있지만, 개통 후 운영단계로 넘어가면 서비스 유지만 가능한 수준에서 요금이 책정된다. 공공서비스의 특성상 요금인상이 억제된 상황에서 손익을 맞추다 보면 운영사는 이동 기능만을 유지하기에도 급급하다. 오래된 철도 역사일수록 전통과 문화가 쌓이는 것이 아니라 낙후된 시설이 눈에 띈다. 철도를 지하화하더라도 역과 승강장에서만이라도 이용객이 생각의 전환을 할 수 있도록, 사용하는 이들의 정서적 권리도 고려한 개발을 기대하는 것은 욕심일까.

손혁기(SR 홍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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